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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도, 탈도 많았던 그 소설이 영화가 되어 나왔다.
페미니즘-정확히는 뷔페니즘-에 마냥 우호적인 입장은 아닌지라 삐딱한 시선으로 바라볼 수 밖에 없는 것이 사실인데, 그렇다 하여 '여친이 김지영보자길래 그거 보면 헤어질거라고 했다' 류의 남초적 (허구적)무용담을 보며 그리 마음이 편하지도 않았다. 그 이유인즉슨
1. 나는 영화도, 소설도 보지 않았으므로 이에 대해 보지도 않고 무작정 까는 행위를 하고싶지 않으며
2. 1982년에 태어난 김지영이라는 캐릭터가 마냥 '남'으로 인식되지는 않았기 때문이다.
감정적으로야 이건 좋고 저건 나쁘다, 저건 잘못됐다 라고 말하기는 굉장히 쉽다. 새로이 부상하는 떡밥에 대해 인터넷 검색 1시간쯤 해보면, 이 토픽에 대한 주요 공격 및 찬양 포인트들이 일목요연하게 보인다. 영화를 비판하고싶을 때, 영화를 볼 필요도 없이 그냥 어디서 줏어들은 얘기를 바탕으로 그럴듯하게 안좋은소리를 적어놓아도 별로 티는 안난다는얘기다. 사실 이런 모사의 모사가 되풀이되는게 현대 여론의 본질 아닐까 싶기도 하지만.
두번째 이유는, 내 성장배경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내게는 빠른 83년생, 그리고 84년생 누나가 있고, 나는 90년생 늦둥이 아들이다. 나의 큰누나는 사회적으로 김지영과 동갑이며, 딸 둘 있는 집의 늦둥이 아들이라는 것은, 그 태생부터가 가부장제의 業인 존재이다.
장담컨데, 김지영 영화를 personal하게 받아들이는 정도로는 내 또래(90년생 전후) 남자들 중에서 상위 10퍼센트에는 들 거라 생각한다.
영화를 본지 거의 두달쯤 된 지금, 보고 난 뒤 무슨 이야기를 하려 했는지는 더이상 자세한 기억이 나질 않는다.
다만, 몇가지 사항을 적어보고자 한다.
- 혹자들은 영화가 너무 오버한다며 까지만, 지극히 영화적인 과장의 선상에서 용납가능한 수준이라 생각한다.
영화속에 나오는 남녀차별적인 가정의 모습은 분명 허구에 가깝지만, 그 모티브와 디테일들이 어디서 나왔는지는 너무나 명확하다. 대놓고 말은 안했지만 나와 누나들을 대하는 친척들의 태도 차이, 누나들도 아꼈지만 나를 유독 우선순위에 두었던 할머니라던지. 누나들의 가치를 깔아뭉개는 장면은 분명 상식적인 가정에서는 쉬이 찾아볼 수 없는, 일종의 오버라 할 수 있겠지만, 그럴거면 김치로 싸대기를 때리고 오렌지주스를 뿜는 아침드라마는 왜 폐지하라고 소리를 높이지 않는가?
김지영 가정의 가장 비현실적인 부분이라면, 저 속편하고 멍청한 남동생이라 하겠다. 속된말로 고추달고 태어나서 집에서 대접받는것을 당연하게 여기고, 왜 자신과 누나가 다른 대접을 받는지에 대해 단 한번도 생각해본적이 없는 저 멍청한 모습을 보라. 13살이라면 가능한 모습이지만, 서른은 됨직한 인간이 보일 모습은 아니다. 오히려 작가의 디테일 부족은 이런 부분에 있지 않을까 - 아 못배운 멍청한(그래서 내가 상종하고싶지조차 않은 족속들은) 인간들이라면 저러고 살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든다.
- 정신병으로 다른 사람에 빙의해야 자기 속을 털어놓을 수 있게 된 지영을 보고서, 자기 엄마를 흉내내는 딸을 보고서 억장이 무너지는 지영의 엄마를 보며 속에서 무언가 울컥 하는 부분도 있었다.
여기에서 엄마가 김지영을 붙들고 '아이고 엄마 어흑흑'하는식으로 흘러가면 어떡하나.. 생각한 것은 내가 별로 보지도 않는 한국드라마 전개를 너무 경계하는것 아닐까.
- 공유는 착하지만, 무식이 죄라면 죄라 하겠다. 육아의 의미에 고민없이 아기를 갖고싶다는 그 투정하며, 부산의 인터넷 고민상담글에서나 볼법한 시집에서 우유부단한 멍청한 자식놈으로 희희낙락하는 꼬라지까지.
다만, 82년생 아내를 둔 남편이라면 아마 그러고 살았을수도 있겠다 싶다. 그들의 세상에선 지금 시대의 상식이 당연하지 않았다.
아무튼 골로보낼뻔 한 아내를 간신히 붙든 공유는, 다행히, 이후에는 믿지 못할만큼 상식인 포지션에서 활동한다. 그럼에도 지난 수년간 속앓이해온 아내를 보듬는 일은 그리 쉽지 않으며, 그 아둥바둥 벼랑끝에서 휘청대는 과정은 지켜보는 나로 하여금 숨막히게 하였다.
김지영이 정신병이 있음을 털어놓을때 핸드폰 영상을 보여주어 쓸데없는 갈등을 만들어내지 않은 작가들에게 감사함을 표한다.
- 자신의 불만을 토하지 않으면 정신병에 걸린다. 자기 의견을 표현하지 못하는 머저리들을 내가 싫어하는 이유기도 하다. 조만간 속에서 열불나 미쳐날뛸놈이거나, 아니면 배알이 없는 인간들 모두 피하고싶은 존재라 하겠다.
그렇지만 맘충은 확실히 오버한 부분이다. 김지영처럼 상식적인 아이와 엄마랑은 다르게, 정신나간 행동을 뻔뻔히 하는 엄마들이 있으며, 이들은 분명 비판을 받아야 한다. 잘 만든 영화의 끄트머리를 괜시리 맘충을 끼워넣어서는 망쳤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아무튼, 극중 캐릭터 감정에 몰입하여 나도 울컥하거나 숨이 턱 막히기도 하는 현대 사회를 배경으로 한 드라마 영화였다. 눈에 거슬리는 부분이 없는건 아닌데(그 가정은 뭘 먹고 살아야하는지 알 수 없는 결말이라던가, 맘충파트라던가) 거지같은 세상에서 악의없이 서로를(일방적으로-가 맞는 표현이겠지) 상처입히는 인간들이 꾸역꾸역 살아나가고 더 나은방향으로 가는 모습을 따스하게 바라보는듯 하는 영화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