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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6살무렵의 일이다. 아니면 7살일지도 모르겠다.
본가인 개포현대2차는 참 심심한 동네였다. 아파트상가 문방구는 정말로 학용품만을 파는 곳이었고, 으레 있기 마련인 뽑기(동전넣고 돌려서 동그란 플라스틱 알에서 싸구려 완구를 뽑는 그것)조차도 시대에 뒤쳐진-그냥 내 흥미를 끌지 못했다고 표현하는것이 더 정확할 것이다- 그런 곳이었다.
그러니 오락기나 간식은 언감생심이다. (물론 시간이 지나고 그 문구점도 오락기를 갖다놓는 시절이 오지만 이는 내가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을 때의 이야기다)
하지만 엄마 손잡고 오가며 봤던 다른 동네 문구점 앞에서 나는 구슬동자나 아무튼 내 흥미를 끄는 휘황찬란한 뽑기 기계가 존재함을 잘 알고있었고, 지금 보면 착한아이 증후군쯤 되는 무언가에 걸린 상태였던 나는 그런걸 뽑기위해 엄마에게 조르는 것은 나쁜아이라 생각하여 나의 욕망을 깊숙히 숨겨두었다.
그리하여 유치원에 가지 않는 어느날(주말이었겠지), 부모님 둘다 외출하고 집에 누나(아마도 작은누나)만 있던 날에, 나는 어찌어찌 생긴 나의 사유재산-동전 몇개-를 들고 아파트 정문을 지나, 영동 3교를 통해 양재천을 가로질러, 작은 횡단보도를 건넌 끝에 옆 아파트(개포우성 4차)의 뽑기통에 다다를 수 있었던 것이다.
생각해보라. 성수대교와 삼풍백화점, 그리고 아파트마다 정글짐과 원심분리기가 존재하던 안전불감증 시대였지만 아파트 단지 정문앞에 유치원 셔틀이 내려주어도 보호자가 교사한테서 이를 인수인계받아 집까지 데려가는것이 흔한 중산층의 커먼 센스일지언데, 이 용감무쌍한 꼬맹이는 동전 몇개를 주머니에 넣고서는 어른 걸음으로 10분걸리는 옆동네에 뽑기장난감을 사겠다고 꾸역꾸역 걸어간 것이다.
thㅔ 상에....
제일 가관인것은, 집에서 떠나며 누나한테 내가 했던 말이다. "바람좀 쐬고올게"
..... 진짜다.
열다섯먹고 해도 쉰소리한다고 쿠사리먹을 소리를 하고서 나는 집을 나섰다.
하지만 무심하기가 이를데 없는 우리 남매관계였기 때문에(이미 초등학교 고학년에 들어섰던 누나이다) 나는 아무런 제지를 받지 않고 30분간 집밖에 나갔다가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무렵 도어락 따위는 정말 잘사는 집에나 존재하는 아이템이었으므로 나는 다시 문을 두드리고(벨에 키가 닿았을까?) 집에 들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 행동이 들키면 큰일날 일이라 생각했으므로 이 무용담을 엄마에게 알리지 않았고(사실 누나들도 내게는 엄마와 같은 존재로 공범보다는 중간관리자의 느낌이 강했다), 그래서 아마 집에 별 일이 없었을 것이다.
하지만 나는 뽑기란 것, 보다 정확히 이야기하자면 화려하기 이를데 없는 뽑기통 광고판 구석에 적혀 있는 "견본 외 다른 상품이 있을 수 있습니다"라는 문구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몰랐고, 쓰레기같은 장난감 몇개만을 손에 쥔 채 집에 돌아와야 했고, (아마도 당일?) 남은 동전을 털어서 뽑기 대원정에 다시 나섰던것으로 기억한다.
아마 당일이라고 확신하는 이유는, 바람 좀 또 쐬고올게- 이것이 두번째 출사표의 내용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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